한 번도 취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내가 취업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못했다. 대한민국에서 고졸로 살아가는 일은 만만치 않은 일이고 취업 시장에 대해서는 깔끔하게 포기했었다. 아무도 가격을 매기지 않았지만 나 스스로 이 시장에서 내 가격표는 0원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그런 생각은 프로그래밍을 공부하면서도 이어졌다. 나름대로 2020년을 치열하게 보냈지만, 내가 정말로 돈을 받고 일하는 개발자가 될 수 있을까 계속해서 의심했다. 2020년 회고 마지막 문장에 “내년 오늘은 개발자로서의 첫 회고를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썼다. 작년 오늘 내가 바랐던 대로 나는 개발자로서 회고를 쓴다.
1, 2월에는 포트폴리오로 사용할 마지막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처음으로 도메인을 달고 이게 내가 만든 사이트야!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결과물이었다. 볼품없지만 볼품없기 때문에 내게는 더 의미있는 포트폴리오였다. 이걸 완성하고 내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서 그동안에 배우고 했던 일을 정리해서 이력서를 만들었다. 내가 정한 나름의 기준을 만족하는 회사에 지원서를 냈다. 처음 서류 합격했다고 전화가 온 날은 정말이지 말 그대로 날아갈 것 같았다. 서류 합격이라니! 완전히 붙은 것도 아닌데 그것만으로도 너무 기분이 좋았다. 염두해뒀던 곳 중 하나여서 더 그랬다. 그렇게 미친듯이 면접 준비만 했다. 예상 질문들을 리스트업하고 하나하나 직접 답을 찾고, 구어체로 자연스럽게 나올 때까지 연습했다. 무서웠고, 무엇보다 쪽팔리기 싫었다. 한 시간 정도 대면면접을 봤는데 대답하다가 중언부언 할 것 같으면 모른다고 했고, 아는 건 최대한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했다. 경험이 괜찮았고 면접자들의 배려하는 태도와 CTO에서 느껴지는 개그캐의 기질에서 재밌을 것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중간에 왜 경력자 뽑는다고 했는데 나를 불렀을 것 같느냐는 대답에 열심히 하고 있다는 흔적을 조금씩 남겨왔고, 그런 모습을 좋게봐주신 것 같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기술면접을 합격하고 대표와 2차 면접까지 무난하게 잘 끝났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정말 뛸듯이 기뻤던 것 같다. 눈물나게 기뻤다! 아, 나도 되는구나. 진짜 되는구나.
출근을 며칠 앞두고 내 취업 축하를 위해 친구들을 만났다. 그때 입사하기로 한 회사 인사팀에서 전화가 왔다. 직감적으로 안 좋은 얘기라는 느낌이 들었다.
“정말 죄송하지만 합격 통보를 번복해야 할 것 같아서요. 내부 사정으로 인해서 합격이 취소되셨어요”
안에서 무언가가 무너져내리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 지도 왜 그런 건지도 물어보지 못하고 그냥 바보처럼 알겠습니다 하고 끊었다. 그날 만난 친구들에게도 합격이 취소되었다고 말하지 못했다. 그냥 축하를 받고 돌아왔다. 묵묵히 다시 준비하면 된다고 달랬지만 그래도 그때는 좀 힘들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자 애인인 c가 있어서 그나마 잘 이겨냈던 것 같다.
그 이후로는 그럼 그렇지 싶을 만큼 서류 통과가 되지 않았다. 내 하한선을 좀더 내려서 지원을 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때쯤 지금 다니는 회사의 채용공고를 봤다. 그 회사가 강조하던 게 업무 시간에 공부할 수 있고, 상식적으로 일할 수 있는 회사라는 거였다. 지금 다니고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로 그 채용공고가 마음에 들어서 지원했다. 꼭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정말 서류가 됐고 과제를 받았다. 내심 자신이 있었는데 코딩 테스트 공부도 제쳐두고 포트폴리오에만 완전히 열과 성을 다했기 때문에 그때 배운 것들이 무조건 이번에 도움이 될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또 그때 막 객체지향의 사실과 오해나 오브젝트 같은 책을 읽고 있었기 때문에 정말로 의욕과 자신감이 넘쳤다. 작은 웹 애플리케이션을 만들고 도커로 바로 실행할 수 있도록 만드는 거였는데, 마감 시간 1시간 전까지 과제를 했다. 그게 절대적 기준으로는 형편없을지 몰라도 내 기준엔 내가 아는 모든 걸 다 적용한 프로젝트였다... 근데 연락이 없었다. 이거 아주 괘씸한 회사구만. 일주일이나 시켰으면 뭐라도 피드백을 줘야 할 거 아니야. 구리면 구리다고 말이라도 해주던가.
그런 찰나에 합격을 취소 시켰던 회사 CTO에게 전화가 왔다. 그때 사정을 설명하고 사과하고 아직 결정된 회사가 없으면 다시 한 번 고려해달라는 것이었다. 내가 좀 비참했던 건 불쾌하지 않고 기뻤다는 거다. 때려서 미안! 이제 안 때리고 다시 친구해줄게! 하는 느낌이랄까. 일단 진행 중인 회사가 있으니 시간을 달라고 했다. 엄청 고민했는데 번복한 그 회사로 다시 가기로 결정했다. 어차피 과제 낸 회사는 아직 된 것도 아니고 확실하지도 않았으니. 그런데 타이밍이라는 게 참. 그때 과제 전형에 합격했으니 기술면접 보자고 연락이 왔다. 난 다급한 마음에 그날 저녁에 바로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어차피 갈 회사가 있으니 부담가지지 말고 면접이라도 봐보자는 생각이었다. 화상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과제물에 대한 칭찬을 해줬다. 정말 기뻤다. 그만큼 열심히 했기 때문이다. 1시간 30~40분 가량 인터뷰를 진행했다. 면접자가 나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게 느껴졌고, 나도 면접이 끝난 다음에는 이미 이 회사에 마음이 가 있었다. 무엇보다 사람을 존중하는 회사라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막내가 대표의 의견에 반대할 수 있다. 그게 우리 회사가 지향하는 문화다. 정말인지는 몰랐지만 직원이 대표를 칭찬한다는 것부터가 나는 이상하고 재밌다고 생각했다.
면접이 끝나고 정말 고민 많이 하고 여기저기 물어보기도 하고 그러다가 결국 두 번째 회사를 선택했다.
최종 합격 통보를 받고 3일 뒤에 바로 출근했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합격 통보 → 출근까지 가장 빠르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5월 11일에 처음 개발자라는 이름을 달고 출근했다. 벌써 7개월이 지났다. 6월부터는 개발팀 내에서 스터디를 가장 많이 하는 사람을 뽑았는데 11월까지 쭉 내가 일등했다. 사실 여기에 대한 약간의 회의도 있긴 하다. 정말로 내것으로 정리하는 게 아닌, 공부를 위한 공부가 되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종종 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공부를 위한 공부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시간을 들여서 내 글을 쓰는 일을 안 하게 되고, 책에 정리되어 있는 내용을 필사하는 날이 더 많기 때문에 그렇다. 2022년에는 좀더 내가 생각해서 정리한 글을 더 많이 써보려고 한다.
업무는 자잘한 것들을 유지보수했는데 크게는 휴가 시스템과 타사 시스템과 우리 서비스를 연동하는 일을 주로 했다. 여기서도 느낀 점들이 있는데 이런 건 따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연동할 때 타사와 소통하는 일의 어려움... 같은 것. 최근에 연동한 회사와는 개발자와 카카오톡으로 의사소통했는데 훨씬 효율이 빠르고 좋았다. 메일로 하면 3분이면 끝날 질문이 3일 간다.
계속해서 기본기를 다지고 있다. 회사에 다니면서 처음으로 코드를 작성하는 일이 무서웠다. 내 코드가 안전하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까? 이런 생각을 많이 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테스트에 관심이 생겼다. 테스트 코드를 짜는 것도 나름의 러닝 커브가 있고, 아직까지 배워가는 중이다. 2022년 목표 중 하나가 TDD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객체지향적인 코드에 계속해서 관심이 있고, 오브젝트(아직도 완독 못했다)와 토비의 스프링을 찬찬히 살피는 중이다. 최근엔 ‘만들면서 배우는 클린 아키텍처’를 읽으면서 헥사고날 아키텍처라는 구조도 처음 알게 되었다. 조금씩 영역을 넓혀가면서 DDD라는 것도 공부해보고 싶다.
그외에 인프라 AWS, 쿠버네티스, 프론트엔드 등 이런 지식은 거의 없는데, 아직 어떻게 공부할 지 계획을 세우진 못했다. 어쨌든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많다는 건 나쁜 소식은 아니다.
실제 업무에 대해서는 거의 적지 못했는데, 어디까지 적어도 되고 어디부터 적으면 안 되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회고하고 정리하려고 한다. 이번 년도에는 회고 글을 적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냥 이대로 잊어버리는 게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들어 잠깐 짬내서 쓴다. 쓰다 보니 해가 넘어가서 2022년이다. 올해는 연 단위로 회고를 쓰지 않고 짧은 주기로 쓰려고 한다. 목표는 주 단위 회고다. 주 단위 회고는 에너지가 적게 들고, 연 단위 회고처럼 기억력을 풀 가동시키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이 있다. 단점은 매주 해야 하니까 번거롭다는 점. 해보면서 나랑 타협할 생각이고 월 단위, 분기 단위, 상/하반기 단위로도 생각해보고 있다. 어쨌든 회고를 멈추지는 않을 것 같다. 난 회고 같은 거 안해. 내가 해봤는데~ 하는 냉소적인 태도를 가질 생각은 아직까지는 전혀 없다. 난 이게 정말 내게 의미가 있는지 검증 중이고, 아직까지는 기록으로서 의미말고는 잘 모르겠다. 그건 회고의 문제라기보다 회고 방식의 문제인 것 같다.
아무튼.
2021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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